나의 사범 졸업 시와 초등학교 초임 발령 일화

竹巖 리드민

 

1955년 3월 31일 사범학교 졸업, 지금부터 약 67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어렸을때 부터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 졸업생 5명 중 유일하게 나는 진학을 했고

게다가 일로읍에도 중학교가 있었으나 목포로 갔다.

목포 제일중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사범학교로 진학했다

목포 고등학교로 가서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형제 간이 많아서

대학까지 졸업하기에는 가정 사정이 허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비가 적게 드는 사범학교에 가서 장학금도 받고, 교사 생활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의 고교 생활은 너무도 어수선하고 학생들도 칼을 갖고 다니며

군화를 신고 군복을 입고 으시대는 무섭고 살벌한 시기였다

학생들끼리 패싸움을 하면서 몰려다니는 일이 허다하며 공고 어깨. 상고 어깨.

목고 어깨 하며 주름잡는 깡패들이 수없이 많았다

빤다롱 바지에 모자는 빵 모자. 상의는 단추를 두 개쯤 열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학교 내에서도 자주 싸움이 발생하고 폭력이 난무했다

 

전쟁 중이라 철로가 폭격으로 망가져 기차는 못 다녔다

곧 복구가 되어 화물차는 다녔지만 여객 열차는 한참 후에 다녔다

나는 육이오 전에는 기차 통학을 했지만 기차가 안 다녀서 13킬로 미터나 되는 그 먼 길을

할 수 없이 왕복 걸어서 학교까지 다녔다

사범학교 3년 동안 꼬박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통학을 한 것이다.

일로읍에서 걸어서 목포까지 통학하는 학생들이 그래도 조금 있었다

곧은 길이라서 기차 철로를 따라서 걸어 다녔다.

우리 집은 목포 인접 무안군 일로읍 죽산리 3구라는 곳으로 3부락이 있는데

모두 약 60여 호가 되고 우리 부락은 범바위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자방포 들 동쪽

산 아래 있는 10채 밖에 안되는 마을이다.

그러나 우리 동네라고 하면 3부락 즉 당월촌. 자방포. 범버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그 중에서 당월촌이 기장 큰 부락이다.

나는 자방포 들을 건너서 삼향면의 철길을 따라서 걸어 다녔다.

내가 늦게 오는 날이면 작은 누나가 들 가운데까지 마중을 나올 때도 있었다

 

일년에 4번 내는 등록금을 아버지는 어떻게든 마련해서 주시지만 나는 낼 때마다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며 납부했다

혹시나 다음 납부금을 못 내서 중도 퇴학 당하면 납부한 돈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럴 정도로 시골에서는 현금 만들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집에는 다행히 소를 기르고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에서 논갈이 요청이 들어오면 그 소를 몰아 남의 논을 갈아서

돈을 받아 납부금을 내주시곤 했다

그때만 해도 소를 기르는 집이 별로 없었다.

우리 집은 농토가 많아서 소를 기르고 있었다.

소가 있어야 논과 밭을 갈고 경작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기계농이 아니어서 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잘 사는 집이라고 해도 납부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육이오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하루는 등록금을 이미 납부했는데 어떤 사기꾼이 우리 집에 찾아와 학교에서

등록금 받으러 왔다고 등록금을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미 납부했다고 쫓아 버렸다고 한다

못 살고 가난한 시절이라 별 사기꾼도 다 있었다

사범학교 2학년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그때부터 통학 열차가 출퇴근 시간만 다니게 되어 등교 시는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하교 시는 기차 시간이 너무 늦어서 항상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래도 등교만이라도 기차를 타고 다니니까 훨씬 편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3학년 졸업 시에는 우리 반에서 1등을 하여

내 성적이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난 1등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내 1년 후배 이방옥이란 친구가

우리 막내 숙모님 친정 집안 4촌 동생이어서 숙모님께 말해서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 당시 숙모님은 결혼초라 서울로 이사 가기 전 우리 집에서 잠깐 함께 살았다.

기차 통학을 하면서도 반에서 1등을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 중에 하시는 말씀이었다

바로 날 지칭한 말이었다

그래서 내 일 년 후배들이 내 성적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3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내 옆에 앉은 짝꿍 이묵형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학급 종례를 마치고 벽 바로 옆에 앉은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 그 친구가

장난으로 내 머리를 벽 쪽에 밀었다

난 아찔하면서 정신이 멍했다

바로 왼쪽 머리를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러나 피는 나지 않고 시각 작용은 해서 기억만 없는 채 그날 집에까지 걸어서 왔다

어떻게 13킬로를 걸어왔나 나도 모르겠다

전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날 저녁 머리가 정말 깨지는 것 같이 아팠다

갑자기 벽에 부딪혀 기억을 하는 뇌혈관이 잠깐 막혔었나 생각이 든다

저녁에 잘 때 비로소 혈액이 돌기 시작했는지 갑자기 머리가 빠개지듯 아팠다.

그래서 그 이튿날 난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머리가 다른 세상에 갔다 온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끔은 머리가 띵~하고 아프다

다친 곳을 만지면 감각이 조금은 없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다

짝꿍 친구라 싸우지도 못하고 그냥 내가 이해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평소에도 성격이 조금은 포악한 편이다.

 

졸업 무렵 목포 사범 졸업생 중 3명을 추천해 올리면 서울시 발령을 내겠다는 통지가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학교에 전달되었다

난 전연 모르고 있었다.

물론 학생들은 알리가 없다

그러나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3학년 1반 반장이던 황준웅 친구에게 같은 고향인

교무주임 문경철 선생님이 귀띔을 해줘서 그 친구가 선물을 사들고

교장실을 찾아 갔다고 한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각반 반장을 추천해 주시라고 교장선생님께 건의를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추천자를 결정하기 위해 "교직원 사정회"를 열고

"각반 1등을 보낼 것이냐 아니면 각반 반장을 보낼 것이냐"를 두고

여러 가지 의논 끝에 결국 반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학교에서도 상당히 신중을 기했으리라 본다.

 

그 이유는 1반의 반장 황준웅 친구가 1등이고. 2반도 반장 이기윤 친구가 1등인데,

3반만 반장은 옥양호 친구이고 1등은 진재명 이라서 반장으로 낙착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내 대신 우리반은 옥양호 친구가 황준웅, 이기윤 친구와 함께 서울 발령을 받았다.

그때 난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고 각반 반장을 보내야 명분도 설 것 같아서

그렇게 결정한 것 같았다.

발령 당시 나는 만 19세이고 우리 동기생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나의 키는 초임 교에 부임해서 갑자기 커 버렸다.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면서 여름방학 때 우리 반 박종우 친구와 같이 퇴직해서

함평읍에 사신다는 우리 반 3학년 때 담임이신 김영택 선생님 집을 조그만한 선물을 들고

인사차 방문해서 늦게야 교직원 사정회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저에게 사정회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졸업 즉시 광주사범. 목포 사범. 순천 사범 졸업생들을 모두

광주 중앙초등학교 강당에 모아놓고 발령장을 주는데 내가 목포 사범 대표로 발령장을 받고

목포 시내 발령도 대표로 받았다.

결국 1등으로 성적이 가장 우수해서 내가 대표가 된 것 같았다.

남자 5명. 여자 7명 모두 12명이 목포 시내 발령을 받았다

 

목포 서부 초등학교 (4명) = (남자) 진재명. 나명수. (여자) 김*순. 장*림.

목포 북교 초등학교 (2명) = (여자) 최*란. 김*순.

목포 유달 초등학교 (3명) = (남자) 서기철. 함종열. (여자) 오*희.

목포 산정 초등학교 (3명) = (남자) 정화삼. (여자) 유*자. 박*전.

 

그 당시 우리 목포 사범학교 졸업생은 모두 207명이었다.

그때 목포 시내에는 초등학교가 5개 (북교.서부.유달.산정.중앙)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가 서부 초등학교였고 가장 좋은 학교가 북교 초등학교였다.

나는 첫 발령을 성적이 좋아서 북교 초등학교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가장 열악한 서부 초등학교였다.

 

서부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나와 같이 발령을 받은 나명수 친구가 어느날

"넌 대표로 발령을 받았는데 가장 열악한 학교로

발령이 난 것이 조금은 이상하다" 면서 교육청에 항의차 가자고 하기에

난 처음은 반대를 했으나 계속 종용해서 그저 못 이긴척하고 따라갔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3 살이나 많고 체격도 좋은 친구다

또 학교 다닐 때 반에서 부반장을 하면서 공부도 잘하는 친구였다.

교육청 안석두 장학사를 만나 발령 기준을 물어본즉 5개 학교의 교사 평준화를 기하기 위해서

우수한 졸업생을 열악한 학교에 고루 배치했다는 말로 답변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그 이상 따질 수가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후에 들어보니 목포 북교 초등학교로 발령 난 두 여자 친구들이

쌀 한 가마니씩 갖다 주고 사전에 부탁해서 북교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자친구 둘 다 목포 시내에서 살고, 한 여자 친구는 목포 우체국장 딸이다

나와 친구 나명수는 우리 둘 다 시골 촌놈들이어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발령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가 서부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서부 초등학교 초임 발령에서 나는 5학년을 나명수 친구는 4학년을 담임했다.

역시 나명수 친구가 이상하다는 말이 맞았었다

 

그래서 나는 약 3년 4개월 동안 목포 서부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우리 학교

조병춘 교사와 당시 목포 중앙 초등학교 강철원 교사와 같이 3명이서

자진 입대하려고 많은 입대자들이 모인 유달 초등학교 강당으로 찾아갔다.

그때가 1958년 7월 하순경이었다.

그래서 8월 1일 자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서 1년 1개월 복무하고 1959년 8월 31일

경기도 포천 일동에서 제대 특명을 받고 집으로 왔다.

입대 일자가 8월 1일이어서 그때는 제대 특명이 매월 말일 자로 나오기 때문에

1개월을 더 복무한 것이다.

그 당시는 교사들은 교보로. 대학생들은 학보로 1년 단기 복무 혜택을 주었다.

단기 복무 혜택을 받는 대신 교보와 학보는 모두 최전방 일선으로 보내 복무 시켰다.

 

2021. 3. 15. 竹巖 리드민

 

 

 

 

 

2018년 제 21회 러시아 월드컵 한국과 독일의 F조 리그전을 보고.

竹巖 리드민

 

우리나라는 9회 연속 월드컵 출전으로 이번 제21회 러시아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세계지역별 대전을 거쳐 각 나라의 명예와 대륙의 명예를 걸고 올라온 32개국이 모여

러시아에서 치르는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전을 거쳐 16강에 오르게 된다.

우리나라는 독일. 스웨덴. 멕시코와 함께 F조에 편성되었다.

리그 첫 게임에는 우리나라는 스웨덴전으로 시작되었고

두번째 게임은 멕시코전. 세번째 게임은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치르는 독일전이었다.

첫게임(0:1)과 두번째 게임(1:2)은 모두가 패배로 쓴잔을 마셨다.

마지막 세번째 독일과의 게임은 우리나라가 독일을 2:0 로 통쾌한 승리물 거두었다.

경기 시작전 세계인은 예측건데 한국의 승리 확률을 1% 라고 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앞서 치러진 제20회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은 우승한 나라이고

FIFA 랭킹 세계 1위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기적이 아닌 이상 한국이 승리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목터져라 하고 응원하면서도 기적만을 바랄뿐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 선수들은 죽을 각오로 열심히 뛰었다.

그야말로 강한 투지와 집념으로 독일과 맞서 싸운것이다.

전후반 0:0으로 90분이 지나고 루즈타임 6분(실제경기는 9분)이 주어졌다.

그때 기적은 사실로 나타났다.

 

손흥민의 프리킥이 독일 문전에서 흔전중 흘러나오는 볼을

김영권 선수가 잡아 보기 좋게 골인을 시킨 것이다.

참으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하는것 같았다.

대한민국의 함성이 세계룰 놀라게 울려퍼졌다.

골인. 골인. 드디어 우리나라가 세계랭킹 1위인 독일을 누른 것이다.

FIFA 랭킹 61위(2018.5.17현재)가 랭킹 1위를 보기좋게 아웃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선심은 업사이드 기를 들었다.

너무도 아쉬운 순간이 되었다.

주심은 즉시 의심이 들어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상대방의 발을 맞고 나온 공을 김영권 선수가 차넘어

업사이드가 아닌 골로 판독이 되었다.

선수와 한국인은 모두가 얼싸안고 뛰는 순간이되었다.

다시 남은 시간 경기가 시작되어 독일림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며

우리 문전을 위협했다.

 

보다 못한 세계적인 독일 골기퍼 노이어도 답답한 심정으로 골문을 버리고

거의 우측 중앙선 부근까지 뛰쳐나와 공을 잡고 돌리는 순간

우리 주세종 선수가 재빨리 낚아 채서 전방에서

손을 들고 신호를 보내는 손흥민 선수를 보고 롱패스로

힘차게 찬공이 독일 문전을 조금 어긋나게 굴러가자

손흥민 선수는 공을 놓칠세라 쓴살같이 달려가서 아웃 직전 골문으로 차넘어

세계가 다 놀라는 2:0 의 웃지 못할 스코어로 독일을 누르고 승리를 한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독일이 80년만에 (1936년이후)조별 리그에서 처음으로 탈락하는

굴욕적인 순간이 되었다,

참으로 통쾌하고 놀랍고 이런 기적도 있구나 하고

손을 들어 목이 터져라 하고 나도 함성을 질렀다.

경기가 끝나자 그라운드에서 우리 선수들은 얼싸 안고 춤을 추며

승리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한국이 16강에 올라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멕시코가 우리덕으로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독일을 2골차로 이기면 우리가 16강에 올라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맥시코는 스웨덴에게 3:0으로 져서 실망을 하면서도 우리가 독일을 이겨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차에 우리의 승리로 끝나자 맥시코 관중들은 우리보다 더 날뛰면서

좋아서 기뻐하고 있었다.

F조는 1위 스웨덴. 2위 멕시코. 3위 대한민국. 4위 독일로 성적표가 나왔다.

남의 덕으로 16강에 올라간 멕시코는 정말로 기뻤을것이다.

경기가 끝나도 관중들은 떠날줄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하여 한참동안

경기장에서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겼다.

세계 최강 독일을... 지난번 우승팀을...

광화문 광장과 강남거리 . 전국의 곳곳의 월드컵 경기장과 공원은 하늘을 찌를듯

한국의 승리를 외쳤다.

 

기적이란 바로 이런것이구나 하고...

그러기에 사전에도 기적이란 말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멕시코에서는 우리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 고맙다는 감사선물이

수없이 답지했고 거리에서 한국인만 만나도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행가래까지

쳐주는 기이한 모습은 정말로 보기에도 감동적이었다.

16강에 올라가는것 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더 좋은 결과라고 생각이든다.

16강 가서 결승까지 올라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세계 1위를 잡는 축구가 더욱 더 빛이나고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역대 월드컵에서

충격적인 순간" 2위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우리 선수들 ...너무도 잘 싸웠다.

대한의 힘을 그대로 보여준 장엄한 축구경기였다.

우리 전 선수들에게 찬사와 고마움의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4년뒤의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걷우기를 기대한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거미손 조현우와. 골을 넣은 손흥민 선수. 김영권 선수에게

더욱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조현우 선수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경기 최우수 선수(MOM)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마음껏 박수를 받을일이다.

손흥민 선수는 월드컵에서 3골을 넣는 선수가 되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영국 BBC는 손흥민 선수와 조현우 선수를 Best 11에 선정했다.

개인 파워랭킹은 손흥민 선수가 13위. 조현우 선수를 48위로 선정했다.

독일 키커지는 김영권 선수를 Best 11로 선정했다. 모두 자랑스러운 한국의 선수들이다.

따라서 우리 신태용 감독에게도 수고와 찬사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대한민국. 파이팅....

대한민국이 아시아 국가중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서 랭킹1위를 꺾은 국가.

월드컵 본선에서 독일을 꺾은 국가.

지난 월드컵 우승국을 꺾은 국가로 기록되었다.

축구는 온국민의 사랑을 받는 구기 경기중 하나다.

 

앞으로 국내 K리그를 더욱 발전시키고 활성화 시켜서 온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갖는 구기경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라에서도 더욱 축구발전을 위해 적극 지원하고 협조하고 시설 확충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다.

지도자들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수 발굴과 육성을 해야 할것이다.

국민들의 일체감을 갖는 경기로는 축구이상 없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축구발전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2018. 7. 2. 竹巖 리드민

 

 

 

 

 

리우 올림픽 축구 대표 팀. 온두라스와 8강전을 보고​

竹巖 리드민

 

우리나라 올림픽 축구 대표 팀은

예선 1차전은 피지와의 경기에서 8 대 0으로 이겼다.

2차전은 막강한 독일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고 막판까지 가서

3 대 2로 이기고 있었는데 페널티 바로 밖에서 프리 킥을 내주어

추가시간 1분 30초를 견디지 못하고 동점으로 비겼다.

3차전은 마지막으로 런던 올림픽 우승 팀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다행히

1 대 0으로 이겨 16강에 예선 1 위로 올라갔다.

이제 8강전이다

처음 상대는 온두라스였다.

온두라스는 전쟁 축구를 한다고 한다.

호르헤 루이스 핀투 감독이 스리 백의 귀재라고 한다.

시작 전부터 신경전으로 감독의 막말이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 신태용 감독은 신사다.

우리나라의 전술과 기술로 온두라스의 골문을 두드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경기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전 7시부터 시작된다.

하필이면 주일이라서 난 교회도 안 가고 응원하기로 하고 일찍이

집사람만 교회에 차로 데려다 주고 왔다.

 

역시 우리나라 선수들은 자기 포지션을 잘 지켜 온두라스보다 잘한다.

전진 패스가 조금은 부족한 것 같으나 날카롭게 공격축구를 구사한다.

전반전은 밀고 당기고 참으로 우리 선수들이 잘하고 있었다

2〜3번의 좋은 찬스를 놓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이 들었다.

 

우리 측 골문 앞에서는 정말로 집중해서 패스를 해야 되겠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상대방 문전에서는 o.1 초라도 빨리 골문을 향해서 슛을 했으면 좋겠다

공을 잡아서 완전하게 슛을 하려면 벌써 상대 수비가 달려든다

페널티 근방에서는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웬만하면 슛을 권하고 싶다.

골은 완전하게 슛을 하는 게 꼭 들어가라는 법은 없다.

골문을 지키는 골 키퍼가 한가운데서 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비켜 차고 아무렇게나 차도 들어가려면 들어간다.

또 상대방의 골 키퍼가 너무도 철벽 문을 닫고 있다.

여러 번의 결정 골을 잘 막아내고 있다.

이런 때는 더욱이 완전한 슛보다는

중거리 슛도 시도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난 축구에는 문외한이지만 항상 아쉬운 게

문전에서 기회 보고 완전하게 슛하기 보다는

운에 따른 찬스 포착의 빠른 슛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저 조금만 톰이 나면 슛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문전까지 가면은 꼭 슛이 있게 하라는 것이다.

 

상대방 문전에서 슛을 못하고 패스하다 공을 뺏기면 안 되겠다

어떤 모양으로라도 꼭 슛을 날리고 공을 뺏겨도 뺏기라는 것이다

우리 팀은 항상 상대방 문전에서 서로 주고 받고 패스를 해서 슛을

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상대방 문전에서는 되도록 패스 없이 받으면 때리는 축구를 보고 싶다.

그리고 논 스톱 슛이 더 성공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감독과 코치가 잘하겠지만 보는 사람으로서는 문전에서 공을 돌리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그리고 오늘은 유독 중앙으로만 파고 들어가서 슛을 날리려고 하다가 자주 막혔다.

시간 봐서 양쪽 사이드에서 공을 올렸으면 했다.

역시 핀투 감독이 생각한 것처럼 역습으로 허무하게 한 골을 내주어

너무도 아쉬웠다.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훨씬 더 좋아 보이고 더 잘하지만 골운이 없었나 보다.

후반에도 2〜3번의 아주 기막힌 좋은 찬스가 있었지만 골을 넣지는 못했다.

내가 보아서는 적어도 2 대 0으로 우리가 이겨야 맞다고 본다.

16대 6의 슛으로 압도적이었지만 골은 없었다.

전술. 기술 모든 면에서 우리가 온두라스를 앞서고는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0 대 1로 패했다.

 

경기가 끝나고 아쉬움이 너무 많아 이 글을 남긴다.

우리 선수들과 신태용 감독 및 코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 선수들의 이번 실력은 리우에서 능히 금메달을 따고도 남는다고 본다

앞으로 기대 이상의 좋은 결과들이 계속 있으리라 믿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올림픽 대표 팀에는 손흥민_황희찬. 석현준_권창훈_류승우 같은 탄탄한 공격진이 있어

이 선수들이 나아가 국가 대표가 된다면 우리나라 국가 대표들의

앞길이 더욱 양양해 보여 큰 박수를 보낸다.

리우에서의 4강 좌절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6. 8. 14. 竹巖 리드민

 

 

 

 

채석포 교회를 찾아서.

竹巖 리드민

 

인간은 항상 인연을 갖고 살기 마련이다.

수십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리고 가장 가까이 지내던 최용태 목사님과

그 사모님을 뵙고자 우리는 먼길을 떠났다.

 

한동안 서로 연락이 끊겨 소식을 모르던 차에

어떤 계기로 해서 최목사님이 채석포 교회에

계신다는것을 알았다.

 

더욱이 우리와는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라

지난 여름에 몇몇교인들이 다녀온 뒤로

우리 부부가 한번 다녀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오늘은 특별한 준비없이

채석포 교회를 찾아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집에서 내차로 오전 9시 20분에 출발하여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이젠 가을도 깊어가는 계절이라

조금은 쌀쌀하나 차를 타고 달리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산과들은 초록빛을 거의 감추고

그저 사철나무만 푸르게 깊은 겨울준비에

고개를 숙인듯 세상은 고요하고 아늑하여

시골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수가 있었다.

 

틱트인 넓은 들판과 멀리서 보이는 자연의 풍광이

어쩌면 그렇게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흥에 겨워 자연의 미를 혼자서 만끽하는 축복의 순간임을 느끼게 한다.

 

항상 막히던 서해안 고속도로도 잘 뚫리고

GPS 덕분에 사정없이 밟아보는 기분도

달리는 여행길을 한층더 즐겁게 해준다.

 

서산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태안읍을 향해

잘 닦아진 지방도로를 따라서 만리포쪽으로 한참을 달리다가

근흥면에 이르러 안내표지판을 보고 채석포쪽으로 좌회전해서

좁은 2차선 도로를 달려가다보니 우리가 찾는 조그만 교회 간판이

우측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이미 간다는 통보를 한지라 우리가 도착하니

목사님 내외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공기좋고 황토땅으로 살기가 좋은 곳에 지은 교회건물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가득 담긴 아늑하고 아담한 건물로 그저 호화롭지 않고

소박하게 지어져 있으나

교회가 기쁘게 우리를 맞이하는 것같다.

 

우거진 솔밭사이로 커다란 소나무가 돋보이고

앞으로 한두채있는 동네마을이 유달리 정막감을

가져다 주고 있으나

멀리 보이는 서해안 바다는 날마다 기도에 사는 성도들의 마음을

씻어주는듯 환하게 눈앞에 펼쳐보인다.

 

목사님이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는 아담한 사택은

남향으로 잘 지어져 있어

깊어가는 가을 헷빛이 거실 안까지 찾아들어

환하게 드리우니 참으로 이곳이 주택 명당이 아닌가 싶었다.

 

사모님이 손수 가꾼다는 화분들도

제철인양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싱싱함이 보는이의 마음을 더욱 밝고 환하게 해준다.

 

시간이 마치 점심때라 미리서 준비한 점심상은

우리 서울에서는 맛볼수 없는 해물과 청정식품들로

성의껏 가득차려 맛있게 밥한 그릇을 눈 깜짝할사이에

비우고 말았다.

 

점심후에는 우리는 인근에 있는 채석포 항구를 찾았다.

조그만 포구로 마침 썰물이라 갯펄에는 수많은 갈매기떼가 앉아 있고

크고 작은 배가 선창에 메달려 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듯

어부들은 볼수없고 배만 쉬고 있다.

 

정다운 어촌 마을. 향기로운 갯내음에 어촌의 풍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인심좋은 시골 어부들의 가슴에 찬

순수한 포구에 가라앉아 정감이 와 닿는것 같았다.

서울에서 수천리 떨어진 시골 어촌마을

너무도 아름답고 한폭의 동양화처럼 느껴졌다.

 

우린 다시 차를 타고 지척지간에 있는 연포 해수욕장으로 갔다.

아무도 없는 넓은 모래사장에는 한동안 북적대던 여름철의 기운이 가시고

조용하기만 했다.

고요한 바닷가에 점점이 떠있는 배들만 풍요로운 해변의 감흥을

그대로 전해주는 듯 잠잠하다.

 

다음에는 차를 몰아 신진도를 향해 안흥 외항으로 달렸다.

옛날은 섬이었지만 지금은 다리를 놓았고 들어가는 입구에는 골프장을 만들고 있으며

산새좋고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서 축조된 항구는 재법 큰 항구를 방불케하는

큰배와 작은 어선으로 가득찼고 멀리서 보이는 등대가 뱃길을 인도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태안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수려한 풍광이 그대로 살아있고

멀고 가까운 주변은 만리포와 안면도를 비롯해서 서해안의

낙원임을 직감할수가 있다.

 

다시 집으로 와서 이젠 내차를 타고 오는길에 몽산포 해수욕장에 들렸다

서해안은 역시 가는 곳마다 소나무가 일품이다.

보기좋은 소나무가 동양의 경치를 대표하는듯 너무도 푸르고 아름다웠다.

 

이곳 몽산포도 우거진 소나무 숲이 십리를 싸고 있어 바다를 좋아하는

수많은 해수욕객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인적은 간데없고 갯펄만이 우리를 반기는 몽산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풍만한 노출에 젊음을 불태우는 짜릿한 수영객들의 모습만

아련해 질 뿐이다.

 

다시 그곳을 떠나 이번에는 서산 간척지인 천수만으로 향했다.

유명을 달리한 정주영 회장님의 손길로 이루어진 천수만 간척사업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그 유명한 일화가 지금도 남아있다.

 

달리는 차창속에서도 아련히 보이는 너른 들판과 바닷길이 우리 가슴을 확 뚫리게 한다

서산 B지구를 지나 A지구를 향해 제방도로를 달리니 깊어가는 가을바람이 간장을

서늘하게 하고 천수만에 모이는 수만 마리의 철새떼가 망원경속으로 빨려들어

철새의 낙원임을 부인 못할 천해의 자연조건임을 보여준다.

 

제방도로 중간에 세워졌던 건물은 이제 재건축을 위해서 건물과 재방축조의 일화가 담긴

간판마저 없어졌고 그저 화장실만 동그마니 지어져있어

초라함을 드러내 주고있다.

 

세계적인 대사업으로 지칭하는 서산 간척지는 그 주인공은 사라졌어도

청사에 길이 빛날 대역사의 현장은 지금도 미래의 비젼으로 남아있어

우리 가슴에 흐뭇함을 주고있다.

"인사이 유명 호사이 유피" 란 이런것인가 보다.

 

친절하시고 다정하신 목사님과 사모님의 안내로

수많은 서해안의 절경을 감상하고 그곳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우린 홍성을 거쳐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서 어둠이 깔리기 전에

서울에 일찍 도착했다.

 

여행이란 항상 느끼지만 새로움이 가득차고

세상을 다시보며 미지의 세계를 달리는 듯한

짜릿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미래를 바라보는 원동력이 될뿐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갖게하는 힘이되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는 기폭제가 됨을 알수가 있다.

 

목사님과 사모님의 친절에 다시한번 깊이 감사를 드리며

목사님 내외분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면서 고마움을 전한다.

 

목사님. 내내 건안하십시오.

 

2005. 11. 10. 竹巖 리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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