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범 졸업 시와 초등학교 초임 발령 일화
竹巖 리드민
1955년 3월 31일 사범학교 졸업, 지금부터 약 67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어렸을때 부터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 졸업생 5명 중 유일하게 나는 진학을 했고
게다가 일로읍에도 중학교가 있었으나 목포로 갔다.
목포 제일중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사범학교로 진학했다
목포 고등학교로 가서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형제 간이 많아서
대학까지 졸업하기에는 가정 사정이 허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비가 적게 드는 사범학교에 가서 장학금도 받고, 교사 생활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의 고교 생활은 너무도 어수선하고 학생들도 칼을 갖고 다니며
군화를 신고 군복을 입고 으시대는 무섭고 살벌한 시기였다
학생들끼리 패싸움을 하면서 몰려다니는 일이 허다하며 공고 어깨. 상고 어깨.
목고 어깨 하며 주름잡는 깡패들이 수없이 많았다
빤다롱 바지에 모자는 빵 모자. 상의는 단추를 두 개쯤 열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학교 내에서도 자주 싸움이 발생하고 폭력이 난무했다
전쟁 중이라 철로가 폭격으로 망가져 기차는 못 다녔다
곧 복구가 되어 화물차는 다녔지만 여객 열차는 한참 후에 다녔다
나는 육이오 전에는 기차 통학을 했지만 기차가 안 다녀서 13킬로 미터나 되는 그 먼 길을
할 수 없이 왕복 걸어서 학교까지 다녔다
사범학교 3년 동안 꼬박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통학을 한 것이다.
일로읍에서 걸어서 목포까지 통학하는 학생들이 그래도 조금 있었다
곧은 길이라서 기차 철로를 따라서 걸어 다녔다.
우리 집은 목포 인접 무안군 일로읍 죽산리 3구라는 곳으로 3부락이 있는데
모두 약 60여 호가 되고 우리 부락은 범바위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자방포 들 동쪽
산 아래 있는 10채 밖에 안되는 마을이다.
그러나 우리 동네라고 하면 3부락 즉 당월촌. 자방포. 범버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그 중에서 당월촌이 기장 큰 부락이다.
나는 자방포 들을 건너서 삼향면의 철길을 따라서 걸어 다녔다.
내가 늦게 오는 날이면 작은 누나가 들 가운데까지 마중을 나올 때도 있었다
일년에 4번 내는 등록금을 아버지는 어떻게든 마련해서 주시지만 나는 낼 때마다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며 납부했다
혹시나 다음 납부금을 못 내서 중도 퇴학 당하면 납부한 돈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럴 정도로 시골에서는 현금 만들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집에는 다행히 소를 기르고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에서 논갈이 요청이 들어오면 그 소를 몰아 남의 논을 갈아서
돈을 받아 납부금을 내주시곤 했다
그때만 해도 소를 기르는 집이 별로 없었다.
우리 집은 농토가 많아서 소를 기르고 있었다.
소가 있어야 논과 밭을 갈고 경작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기계농이 아니어서 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잘 사는 집이라고 해도 납부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육이오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하루는 등록금을 이미 납부했는데 어떤 사기꾼이 우리 집에 찾아와 학교에서
등록금 받으러 왔다고 등록금을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미 납부했다고 쫓아 버렸다고 한다
못 살고 가난한 시절이라 별 사기꾼도 다 있었다
사범학교 2학년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그때부터 통학 열차가 출퇴근 시간만 다니게 되어 등교 시는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하교 시는 기차 시간이 너무 늦어서 항상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래도 등교만이라도 기차를 타고 다니니까 훨씬 편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3학년 졸업 시에는 우리 반에서 1등을 하여
내 성적이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난 1등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내 1년 후배 이방옥이란 친구가
우리 막내 숙모님 친정 집안 4촌 동생이어서 숙모님께 말해서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 당시 숙모님은 결혼초라 서울로 이사 가기 전 우리 집에서 잠깐 함께 살았다.
기차 통학을 하면서도 반에서 1등을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2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 중에 하시는 말씀이었다
바로 날 지칭한 말이었다
그래서 내 일 년 후배들이 내 성적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3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내 옆에 앉은 짝꿍 이묵형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학급 종례를 마치고 벽 바로 옆에 앉은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 그 친구가
장난으로 내 머리를 벽 쪽에 밀었다
난 아찔하면서 정신이 멍했다
바로 왼쪽 머리를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러나 피는 나지 않고 시각 작용은 해서 기억만 없는 채 그날 집에까지 걸어서 왔다
어떻게 13킬로를 걸어왔나 나도 모르겠다
전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날 저녁 머리가 정말 깨지는 것 같이 아팠다
갑자기 벽에 부딪혀 기억을 하는 뇌혈관이 잠깐 막혔었나 생각이 든다
저녁에 잘 때 비로소 혈액이 돌기 시작했는지 갑자기 머리가 빠개지듯 아팠다.
그래서 그 이튿날 난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머리가 다른 세상에 갔다 온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끔은 머리가 띵~하고 아프다
다친 곳을 만지면 감각이 조금은 없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다
짝꿍 친구라 싸우지도 못하고 그냥 내가 이해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평소에도 성격이 조금은 포악한 편이다.
졸업 무렵 목포 사범 졸업생 중 3명을 추천해 올리면 서울시 발령을 내겠다는 통지가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학교에 전달되었다
난 전연 모르고 있었다.
물론 학생들은 알리가 없다
그러나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3학년 1반 반장이던 황준웅 친구에게 같은 고향인
교무주임 문경철 선생님이 귀띔을 해줘서 그 친구가 선물을 사들고
교장실을 찾아 갔다고 한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각반 반장을 추천해 주시라고 교장선생님께 건의를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추천자를 결정하기 위해 "교직원 사정회"를 열고
"각반 1등을 보낼 것이냐 아니면 각반 반장을 보낼 것이냐"를 두고
여러 가지 의논 끝에 결국 반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학교에서도 상당히 신중을 기했으리라 본다.
그 이유는 1반의 반장 황준웅 친구가 1등이고. 2반도 반장 이기윤 친구가 1등인데,
3반만 반장은 옥양호 친구이고 1등은 진재명 이라서 반장으로 낙착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내 대신 우리반은 옥양호 친구가 황준웅, 이기윤 친구와 함께 서울 발령을 받았다.
그때 난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고 각반 반장을 보내야 명분도 설 것 같아서
그렇게 결정한 것 같았다.
발령 당시 나는 만 19세이고 우리 동기생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나의 키는 초임 교에 부임해서 갑자기 커 버렸다.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면서 여름방학 때 우리 반 박종우 친구와 같이 퇴직해서
함평읍에 사신다는 우리 반 3학년 때 담임이신 김영택 선생님 집을 조그만한 선물을 들고
인사차 방문해서 늦게야 교직원 사정회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저에게 사정회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졸업 즉시 광주사범. 목포 사범. 순천 사범 졸업생들을 모두
광주 중앙초등학교 강당에 모아놓고 발령장을 주는데 내가 목포 사범 대표로 발령장을 받고
목포 시내 발령도 대표로 받았다.
결국 1등으로 성적이 가장 우수해서 내가 대표가 된 것 같았다.
남자 5명. 여자 7명 모두 12명이 목포 시내 발령을 받았다
목포 서부 초등학교 (4명) = (남자) 진재명. 나명수. (여자) 김*순. 장*림.
목포 북교 초등학교 (2명) = (여자) 최*란. 김*순.
목포 유달 초등학교 (3명) = (남자) 서기철. 함종열. (여자) 오*희.
목포 산정 초등학교 (3명) = (남자) 정화삼. (여자) 유*자. 박*전.
그 당시 우리 목포 사범학교 졸업생은 모두 207명이었다.
그때 목포 시내에는 초등학교가 5개 (북교.서부.유달.산정.중앙)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가 서부 초등학교였고 가장 좋은 학교가 북교 초등학교였다.
나는 첫 발령을 성적이 좋아서 북교 초등학교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가장 열악한 서부 초등학교였다.
서부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나와 같이 발령을 받은 나명수 친구가 어느날
"넌 대표로 발령을 받았는데 가장 열악한 학교로
발령이 난 것이 조금은 이상하다" 면서 교육청에 항의차 가자고 하기에
난 처음은 반대를 했으나 계속 종용해서 그저 못 이긴척하고 따라갔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3 살이나 많고 체격도 좋은 친구다
또 학교 다닐 때 반에서 부반장을 하면서 공부도 잘하는 친구였다.
교육청 안석두 장학사를 만나 발령 기준을 물어본즉 5개 학교의 교사 평준화를 기하기 위해서
우수한 졸업생을 열악한 학교에 고루 배치했다는 말로 답변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그 이상 따질 수가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후에 들어보니 목포 북교 초등학교로 발령 난 두 여자 친구들이
쌀 한 가마니씩 갖다 주고 사전에 부탁해서 북교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자친구 둘 다 목포 시내에서 살고, 한 여자 친구는 목포 우체국장 딸이다
나와 친구 나명수는 우리 둘 다 시골 촌놈들이어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발령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가 서부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서부 초등학교 초임 발령에서 나는 5학년을 나명수 친구는 4학년을 담임했다.
역시 나명수 친구가 이상하다는 말이 맞았었다
그래서 나는 약 3년 4개월 동안 목포 서부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우리 학교
조병춘 교사와 당시 목포 중앙 초등학교 강철원 교사와 같이 3명이서
자진 입대하려고 많은 입대자들이 모인 유달 초등학교 강당으로 찾아갔다.
그때가 1958년 7월 하순경이었다.
그래서 8월 1일 자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서 1년 1개월 복무하고 1959년 8월 31일
경기도 포천 일동에서 제대 특명을 받고 집으로 왔다.
입대 일자가 8월 1일이어서 그때는 제대 특명이 매월 말일 자로 나오기 때문에
1개월을 더 복무한 것이다.
그 당시는 교사들은 교보로. 대학생들은 학보로 1년 단기 복무 혜택을 주었다.
단기 복무 혜택을 받는 대신 교보와 학보는 모두 최전방 일선으로 보내 복무 시켰다.
2021. 3. 15. 竹巖 리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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